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7. 부산 영도 해녀

영도해녀문화전시관 건립 후 크고 작은 갈등 발생
"바다도 물건도 없어" 신규 해녀 가입 금지 결의
제주에서 시작한 생활.민속지식 삶터 개척 이어져
"학술.문화적 평가 보다 살아온 시간이 가치 있어"

   나란히 작업을 하고 있는 고승여 해녀와 김영호 해녀.           부산 동삼동 어촌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고금순 해녀.
   나란히 작업을 하고 있는 고승여 해녀와 김영호 해녀.           부산 동삼동 어촌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고금순 해녀.

"더는 해녀 못해. 받아주지 않기로도 했고 물건도 점점 없어져서"
영도해녀문화전시관 앞 바다에 테왁꽃이 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안타깝다. 이날 작업 나온 해녀는 6명. 올해 82세인 김영호 할머니부터 가장 나이가 어린 고금순 할머니(69)까지 차례로 물 밖으로 나왔다. 멀리 자맥질 하는 모습을 보고 한참 기다려 만난 해녀들 사이에서 다투는 것 같은 툭툭거리는 말투와 웃음이 쏟아진다.

△나이를 먹는 바다
해녀 망사리에서 나온 건 말똥성게 한 무더기다.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보라성게와 비교하면 한 눈에도 덩치가 작아 보인다. 껍데기의 지름이 약 5cm, 높이가 약 2cm 정도다.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는 조간대의 바위가 많은 곳에서 돌 밑이나 돌 틈에 산다. 아직 제철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보니 엄지 손톱보다 조금 큰 정도의 작은 것들도 보인다. 고무옷을 벗고 간단히 씻은 뒤 바로 성게 손질을 한다. 칼로 성게를 두 조각으로 나눈 뒤 긴 티스푼처럼 생긴 도구로 알을 꺼낸다. 알은 바로 미리 준비해둔 바닷물에 집어넣는다.

그게 뭐라고 싶지만 한 번에 돌을 넘기지 못하고 떨어뜨리면 밑에 있는 성게가 깨진다. 힘들어도 한 번에 넘겨야 하니 물 속에 있는 시간이 꽤 된다. 몇 번이고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어지럼증이 생긴다.그러고 다시 몇 시간 쪼그리고 앉아서 알을 깐다.

손을 쉬지 않는 만큼 눈도 바쁘다. 다른 해녀 망사리에서 문어와 전복이 나오자 이내 탄성이 나온다. 조금 작은 것 같다는 말로 옥신각신하던 분위기는 제일 연장자인 김 할머니의 "괜찮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정리가 된다.

김 할머니를 포함한 제주 출신 해녀들은 원래 남항어촌계 소속이었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이 생기고 판매장 등이 갖춰지며 소속을 옮기게 됐다. "바다가 달라서. 이 쪽에서 작업하려면 여기 어촌계에 가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김 할머니와 몇 명은 수협 조합원 자격은 포기했다. 앞으로 얼마나 물질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큰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고 할머니는 이날 오전 영도구청 등을 항의 방문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지난해 인근에 새로 도로를 내면서 물길이 바뀐 탓에 애써 뿌려둔 해삼 종패가 모두 고사했다. 보상을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진척된 것이 하나도 없어 직접 하소연하러 다녀왔다. 

△가물고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
다른 조에는 제주 출신 어머니를 둔 60대 해녀가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모두 제주 출신이다. 육당해녀라 부르는 지역 해녀도 없다. 평균 연령이 70대를 훌쩍 넘는다. 

구좌읍 평대 출신으로 해녀 경력 47년의 고승여 할머니(72)는 영상자료로 먼저 만났다. 부산박물관에서, 그리고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서 만난 고 할머니는 덤덤하게 자신의 물질 인생을 풀어놨다. 영도 바다 말고도 일본과 서해안으로 물질을 다녀왔다는 얘기가 섞여 있다. 1~3월은 일본에서 사람을 구하고, 서해 해삼 작업은 4월 10일 정도부터 5월말까지 한다고 했다. 나머지는 영도 바다다. 영도가 바깥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고 할머니가 온몸으로 보여준다.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속을 들어낸 성게 껍데기가 쌓인다. 그렇게 작업을 하면 꽤 돈이 된다. 요즘은 소라 시세도 좋지 않고 수온이 오르면서 잡아 두는 것이 더 손해라 힘을 쓰지 않는다.

다시 왜 해녀를 받지 않기로 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몰라도 된다고 말을 아끼던 할머니들 사이에서 "이젠 관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푸념이 나왔다. 이곳 해녀들도 일정 크기 보다 작은 해산물은 잡지 않는 등 나름의 규칙을 지켰지만 다이버 해루질로 인해 잡을게 없어졌다고 했다. 해루질은 원래 얕은 바다와 갯벌에서 맨손으로 수산물을 채취하는 활동이다. 최근 간단한 스노클 장비를 갖추고 어로 행위를 하는 레저 활동이 포함되면서 갈등이 커졌다. 수산자원관리 법상 문어 같은 움직이는 수산물은 자연 채취가 가능하다. 어업 면허권 설정 지역이라고 구분을 두기는 하지만 일일이 단속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숫자가 있는 제주와 달리 손쓸 방법이 없어 아예 손을 놓게 됐다는 설명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이왕 뺏길 거라면 잡고 말자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졌다. 바다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 새로 해녀를 받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더 이상 어촌계에 해녀를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출향 해녀 '동무 물질'
영도에 뿌리를 내린 제주 해녀들의 사연을 옆에서 살핀 이가 있다. 고행섭 전 부산제주특별자치도민회 총괄부회장이다. 구좌읍 세화리 출신의 고 전 부회장은 3남7녀 중 9번째였다. 손위 누님 중 5명이 해녀였다. 어린 시절 바깥 물질 나갔던 누님의 손에 들린 운동화와 새옷, 그리고 당시 너무 귀해서 자신에게는 겨우 반쪽이 돌아왔던 '능금'바구니를 아직 기억한다. 아버지가 삼천포까지 배로 누님과 다른 해녀들을 데리고 갔던 일도 생생하다. 취업으로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하면서 영도 바다에서 만난 해녀들로부터 가족을 떠올렸다. 그것이 1980년대 후반, 해녀 자료 수집의 시작이었다.

고 전 부회장은 "어머니와 누님이 물질했던 흔적을 찾아서 해안가며 섬을 찾아 다녔다"며 "몇 해 전 누님들과 여러 곳을 둘러봤는데 해안도로가 나고 다른 시설물이 생겼어도 구룡포 바다는 기억하시더라"고 운을 뗐다.

부산 영도에서 처음 해녀를 만났을 때만 해도 200명 이상이던 숫자는 지금은 현저히 줄었다.

고 전 부회장의 자료는 거칠다. 학술적 뒷받침이 보태진 매끈한 논문, 보고서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끈끈한 자매애로 서로의 안전을 지키는 '동무 물질', 집안을 돌보고 동생 공부 시킨다고 일찍 해녀가 된 손녀가 바깥물질 첫해 벌어온 1만원을 시작으로 돌밭이며 짜투리 땅을 사모아 시집 밑천을 대준 할머니 사연, 유네스코 등재와 무형문화유산 지정 이후 나잠업 허가를 난발하거나 생업의 기반이던 마을 어장을 뺏긴 근처 바다들의 사정도 꿰뚫고 있다.

언젠가 갯닦이 작업을 하는 해녀들을 보고 어머니를 떠올렸던 얘기도 꺼냈다. "생복이나 소라를 하나 잡으면 주변에 적을 긁어주고 나오던 습관이 밭일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어머니와 작업을 하면 시간이 한참 걸렸었다"며 "삼촌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따라 했다고 하셨다. 책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이 가르쳐 준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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